독노회에서 북노회까지
1. 독노회 창립(1907~ )
1)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으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 항구에 상륙하였다. 그는 알렌이 세운 광혜원에서 의사로 있었으며, 한국어를 배운 후에는 노방전도에 힘썼다.
황해도에 사는 서상륜(徐相崙)이 찾아와서 송천교회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방문하였다. 그 당시 기독교를 믿는 일과 교회를 세운 것을 보고 감개가 무량하여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송천교회 신도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1887년 9월 27에 자기 집에서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다.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부부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한국 땅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여자가 한국에 머무는 일은 신변에 위험하므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해 6월 하순경에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집을 구입하여 1887년 10월 9일에 정식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의 감리교 정동제일교회다.
2) 선교지 협정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여러나라 여러 교파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사들이 선교를 하는데 중복될 우려가 있어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하고 합리적으로 또는 효과적으로 선교를 하기 위하여 선교 지역을 협정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 평안남북도, 황해도, 경상북도, 강원도 남부, 서울 동부, 서울 서부.
미국 남장로교 : 전라남북도, 충청도.
미국 남감리교 : 경기도, 서울북부, 강원도 북부.
캐나다 장로교: 함경남북도.
호주 장로교: 경상남도.
3) 삼자정책(三自政策)
삼자정책은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급(自給)을 의미한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에 대한 사명과 열심은 있었으나 실제적으로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에 대해서는 훈련이 없었다. 래서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네비우스(John Nevius)목사 부부를 초청하여 전도 방법을 배웠다.
네비우스 부부는 1890년 6월에 한국에 와서 선교사들에게 선교정책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강론하였다. 이것이 소위 삼자정책인 동시에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라고 한다. 이 방법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으며 오늘의 한국교회를 부흥케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4) 독노회 설립
1907년(정미) 9월 17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미국 남북장로회, 영국,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 4개 교파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니 회원이 선교사 38명, 조선인 장로 40명, 합 78명이다.
회장은 선교사 마포삼열, 부회장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린서, 회계 선교사 이길함이다.
5) 노회 처리
1) 공의회시에 시취한 신학교 제1회 졸업생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순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7인을 목사로 장립한 일.
2) 목사 이기풍을 제주 선교사로 파송한 일.
3) 전국 지경이 광범하고 거리가 서로 멀어 노회 회집을 자주 하기 불가능하므로 경기 충청과 평북과 평남과 황해와 경상과 함경과 전라지방에 7개 대리회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건을 처리케 한 일.
4) 만국 장로회 공의회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직을 통지하여 그 명부에 본 장로회 명을 기입하도록 청구하되 안식년 귀국 선교사는 총대로 택하여 위탁하기로 결정한 일.
5) 미국 남북장로회와 영국, 캐나다. 호주 네 교회에 장로회 조직에 대한 감사의 뜻을 보내기로 한 일.
2. 서울노회 성립(1966~ )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전국 지역이 넓으며 자주 모이기가 불편하므로 7개 대리회를 두어 지역 내 교회를 관할케 하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가 8도 였는데 경기도와 충청도를 합하여 “경충노회(京忠老會)” 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충청도가 경기도에 인접하였으며 특히 교세가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리회 교회 수는 다음과 같다. 경충대리회 50교회, 평북대리회 160교회, 평남대리회 89교회, 함해대리회 47교회, 전라대리회 127교회, 경상대리회 186교회, 함경대리회 78교회, 합계 737교회다. 그 후 1911년에 전국의 대리회를 노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래서 경충대리회는 “경충노회”가 되었다.
경기충청노회가 조직된지 13년 동안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여 경기 일원과 충청지방을 한 노회 안에 둘 수 없는 실정에 이르자 1924년 3월 4일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26회 노회에서 충북노회를 분립하기로 결의하고 총회에 헌의하였다.
2) 경기노회 및 경성노회시대
제13회 총회에서 허락을 받아 경기노회와 충청노회로 분립케 되어 1924년 12월 19일 안동교회에서 선교사 3인, 목사 3인, 장로 10인이 출석한 가운데 회장 오건영 목사, 부회장 리강원 목사를 선임하고 경기노회 제1회 노회가 열렸다. 당시 경기노회의 교세는 선교사 7명, 시무목사 17명, 무임목사 1명, 장로 68명, 조사 남자 22명, 여자 45명, 전도인 남자 3명, 여자 18명이며 조직교회 36교회, 미조직교회 59교회, 입교인 248명, 교인총수 6,831명, 유년주일학교 학생 수 2,386명이었다. 1932년 6월 2일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16회 노회에서는 경기노회와 경성노회 양 노회 분립안이 가결되어 총회에 헌의했던 바 그 해 제21회 총회에서 노회 분립이 허락되어 10월 11일 새문안교회에서 경성노회가 분립 조직되었다.
3) 경충노회의 분열
그러나 경성노회 지경 안에 있는 몇몇 교회들이 경기노회에 소속하겠다는 진정서를 다음해 총회에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경충노회가 조직되었다. 경충노회의 핵심인물은 적극 신앙단과 맥을 같이하는 “반서북”, “반선교사”, “ 반보수” 의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총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력한 결과 1973년 두 노회가 화해하여 원상복귀하고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1939년 3월 28일 기독교서회 회의실에서 경성노회 임시 노회가 모여 총회가 차재명 목사를 피어선 성경학원 이사로 임명한 데 반발하여 차 목사를 제명하고 이어 1940년 2월 19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임시 노회를 열고 ‘총회’를 탈퇴하고 남선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경성, 경기, 충청 등 3개 노회가 가세하였는데 서북세를 배제하는 새로운 남부 총회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29회 총회와 30회 총회에 총대 파송조차 하지 않았다.
4) 일제의 교회 탄압
이 무렵은 일제가 한국교회를 매우 심하게 탄압하여 일본 당국이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했으며 1940년에 각 교회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19412년에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케 하였다. 일본 당국은 1942년 서울에 혁신교단을 창설케 했는가 하면 다시 1945년 7월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만들어 모든 교파를 하나로 묶었다. 경성노회도 역시 조선교단 경성교구회로 다른 교회들과 함께 통합되었다.
5) 경기노회 재건
1945년 해방이 되자 양분됐던 경기, 경성노회는 해방의 벅찬 기쁨을 안고 통합되어 경기노회로 환원되었다. 일제 말기에 입은 상처의 치유와 민족의 비극 원인이 된 국토분단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월남 교우들의 수용을 갖추는 일과 건국 작업과 혼돈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가로놓여졌다. 강제로 추방당했던 선교사들이 속속 돌아오고, 해외 신학자들의 잦은 내왕은 신학적으로 큰 과제를 던져주었다. 경기노회 제60회 노회가 1953년 5월 12일에 인천제일교회에서 모였다. 이 모임에서 총회 불법 시정 헌의안이 총회에서 부결되어 불법을 시정할 때까지 총회 총대 파송을 보류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러나 1953년 11월 17일 승동 교회에서 모인 제61회 노회에서는 총회 총대 파송을 보류한다는 가결을 번안하기로 하고 총회 총대를 파송하기로 가결하였다. 1943~1945년은 일제 말기로 노회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46년부터 노회가 부활하면서 북한에 있는 교회가 폐쇄되고 남한에 전남, 제주, 순천, 부산, 전북, 충청, 경기, 경안, 경북, 경동, 경남 등 11개 노회로 구성되었다.
6) 한남노회 분립
1957년 11월 19일 연동교회에서 제69회 노회가 소집되었는데 회원 수가 370여명에 달하고 노회가 너무 방대하므로 경기노회의 한강 이남을 한남노회로 분립하기로 하고 총회의 허락을 받아 1958년 11월 18일 승동교회에서 경기노회 제71회 회기중에 한남노회가 정식으로 분립되었다. 1958년 11월 18일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71회 노회에서 총대 선거에서 개표수 착오 발표가 도화선이 되어서 경기노회가 승동측과 다시 분열했다. 1966년 11월 22일에 연동교회에서 회집한 제87회 노회에서 경기노회 명칭을 한남노회가 사용하고 본래의 경기노회는 서울노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3. 서울 동노회 분립(1969~ )
서울노회 제92회 정기노회가 1968년 11월 18일 연동교회에서 회집할 때 경내에 속한 교회수는 186, 기관수는 5, 세례교인수는 21,476, 목사는 176명이었다. 당시 교단에서는 최대의 노회였다. 이렇게 비대해 가자 노회로서는 그 넓은 지역을 관리하기에 힘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했던 서울노회에서는 영락교회에서 모인 1969년 9월 25일 제54회 총회에서 서울노회에서 헌의했던 3개노회 분립안이 결의되었다. 이렇게 분립안이 결의되자 서울노회는 종전의 회기수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으며 새로 분립해야 하는 노회는 총회에서 허락해 준 대로 서울동노회는 미암교회 이태준 목사가 맡았으며 서울서노회 소집책은 유호준 목사가 맡았다. 한편 총회에서 3개 노회 분립안에 의해 준비를 하던 중 드디어 역사적인 분립을 위해 1969년 11월 18일 오전 10시 30분에 새문안교회당에서 서울노회가 서울노회, 서울동노회, 서울서노회, 3노회로 분립하는 예배를 서울노회장 김성수 목사의 사회로 드렸다.
2) 서울동노회 조직
1969년 11월 18일 오후 1시 역사적인 서울동노회 창립노회가 동신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날 서울동노회는 동대문, 성북, 동북의 3개 시찰로 이루어졌는데 교회는 69개처, 기관 1개처, 세례교인 5,313명, 목사는 55명이며 제1대 임원은 다음과 같이 조직하였다.
회장 : 장영호 목사 부회장 : 임택진 목사 서기 : 강도순 목사 부서기 : 길영찬 목사
회록서기 : 나기환 목사 부회록서기 : 조요섭 목사 회계 : 황정식 장로 부회계 : 김화용 장로
각 부서로는 9부 (임사부 전도부 교육부 고시부 재정부 사회부 규칙부 농촌부 공천부) 3위원회(각시찰위회 협동사업위원회 유지재단위원회)를 두었다가 점차 늘어 군목부, 교회개척위원회, 남선교지도위원회, 부녀지도위원회, 장학위원회 등으로 증가되었다.
3) 역대노회임원
우리가 이상에서 임원 명단을 살펴보면 거의 이북출신 목사 장로들이었으며 전 회기 부회장은 회장을 잘 보필하면서 1년간 쌓았던 경험을 살려 노회장으로 추대하기 때문에 노회는 질서있게 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임원 선거 중 부회장을 선출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였다. 1976년 11월 노회에서는 장로로서는 최초로 김재호 장로가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부터 서울동노회에서는 4년 지나 5년째 되는 해 간격으로 장로가 노회장으로 선출되는 불문율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로가 노회장 수임중에는 성례는 물론 목사 안수기도와 설교를 사양함으로 목사와 장로 간에 보기 좋게 조화를 유지하였다.
4) 70-80년대
처음 서울노회에서 분립했을 때는 불과 3개 시찰뿐이었던 서울동노회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질적 향상과 양적 부흥을 이루었다
각 시찰별 교회수와 세례교인 그리고 1976년 9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모인 총회에서 임택진 목사(청량리중앙교회)가 부총회장으로 당선되고 1977년 62회(동신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승계 추대되었다.
5) 이런저런 낙수(落穗)
초창기 서울동노회의 공천부 배정은 3년조에서 이미 끝났던 회원이 다시 2년조로, 1년조로 끝마감을 해야 하는데 임택진 목사, 조남기 목사, 임 옥 목사 등은 정치부장으로 2-3년 씩을 계속 역임한 바 있었다. 1971년 9월 제56회 총회에서 강도사(講道師)란 명칭이 강도(强盜)라는 한글발음과 같아 그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강도사제도를 폐지하고 이후 신학교를 졸업해도 그냥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목사고시에 합격을 하면 신학교 졸업 2년 후에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1978년 5월 정기노회시 전도사고시에 응했던 장신대 신대원 재학생 중 면접시험에 어느 전도사가 문희석 교수로부터 모세 5경 중 창세기 1장~6장을 신화설로 배웠다는 보고가 나오자 즉시 고시부원들이 모여 이 문제를 총회에 헌의하고 한국 장로교 신학에 맞지 않는 학설을 주장하는 교수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조사위원 5인을 선정, 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의 하였다. 서울동노회에서 헌의했던 이 안건은 총회에서는 신학교육부로 이송하여 조사하였으며, 신학교육부 보고시 본인 문희석 교수가 이를 해명하고 총회에 사과함으로서 일단락을 맺은 일이 있었다.
6) 총회에 헌의한 각종현안들
① 기독교학교에 예배 및 성경교과 운영에 관한 건의서 제출(1973. 5. 7. 노회촬요)
② 여전도연합회가 청원한 여장로제도를 두기로 헌의(1976. 5. 3. 노회찰요)
③ 총회대회제도 신설 청원키로(1977. 5. 2. 노회찰요)
④ 모든 교역자들이 총회 은급(1960. 제45회 총회에서 결의)에 가입하도록 독려할 것.(1977. 11. 7. 노회촬요)
⑤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유신정권에 반대한 시국성명서 발표토록 헌의(1980. 5. 5. 노회찰요)
⑥ 서울북노회와 분립하기로 가결(1982.5. 노회찰요)
4. 서울북노회 조직(1983~ )
1) 노회분립의 태동
서울 북노회는 1983년 서울동노회, 제28차 노회에서는 노회를 발전적으로 분립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으며 이 결의는 동년 9월에 개최한 제68회 총회에서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노회임원회는 (노회장 오병수) 분립준비위원을 선정하여 구체적인 분립계획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분립위원 : (목사) 오병수, 한기원, 최덕한, 우영락, 임 옥, 변동일 / (장로) 이영갑, 임병환, 이영택, 백윤종
분립위원들은 9월 29일에 회집하여 서울동노회는 동시찰, 중부시찰, 동대문시찰, 동북시찰구역으로 편성하고 서울북노회는 북시찰, 성북시찰, 서시찰구역으로 분활키로 한바 분립되는 양노회의 교세는 서울동노회가 교회수 77, 목사 73, 장로총대 121명이고 서울북노회는 교회수 79, 목사 80, 장로 82명이다. 그리고 서울동노회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과 동산은 각각 50%씩 반분하기로 원칙을 정하고 서울동노회는 임병한 장로를, 서울북노회는 이영갑장로를 관리실무자로 선정하여 위임하기로 하였다. 1983년 11월 7일에 동신교회에서 제29회 서울동노회를 개회하면서 발전적인 분립예배를 드림으로 서울동노회로부터 서울북노회가 분립되었다.
2) 서울북노회 조직
1983년 11월 7일 14시 서울북노회 제1회 창립노회가 신성북교회당에서 회집하여 소집자 오병수 목사의 사회로 다같이 묵상기도하고 찬송 198장을 기립하여 제창한 후 신앙고백(사도신경)을 하고 노회 분립위원 박석규목사에게 기도케 한 후 오병수 목사가 성경 마태13장 31-33을 봉독하고 신성북교회 여전도회 성가대의 찬양에 이어 회장이 “천국의 성장과 확신” 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다음 찬송 203장을 제창하고 오병수 목사의 축도로 동일 14시 창립예배를 마치다.
참석회원 : 목사 80명중 76명 출석, 장로 82명중 68명 출석. 총 162명중 144명 출석.
예배 후 임원을 선거하니 피선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 김윤식 목사, 부회장 : 조영택 목사, 서기 : 최덕한 목사, 부서기 : 최병두 목사,
회록서기 : 한태인 목사, 부회록서기 : 최창수 목사, 회계: 이영갑 장로, 부회계 : 김범열 장로
3) 계속적인 성장
2회 (1984. 5. 7. 종암교회) 도농간의 유대강화와 무교회지역을 전도하여 10년 후에 배가부흥성장할 것을 다짐. 3회(1984. 10.29. 장석교회. 노회장 조영택 목사) 서울동노회의 규칙을 명칭만 바꾸어 사용함의 불편을 실제 상황에 맞도록 서울북노회 합리적 운영을 연구하기로 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4회(1985. 4. 30. 영암교회) 조영택노회장 사임(이민)으로 홍재구목사가 보선되었다. 5회 (1985. 10. 28. 삼양제일교회. 노회장 홍재구 목사) 규칙개정 부회장 목사 장로 각 1인 2명을 부회장 1인으로, 단군전 건립반대를 거쳐 6회는 1986년 4월 28일 오전 10시 영암교회 예배당에서 회집되었다. 금번노회는 노회산하의 지교회들이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으므로 동시에 노회가 많은 성장이 이루어졌음에 감사하며 회집되는 노회였다. 노회가 분립된지 3년차를 맞이하면서 분립당시의 세례교인 수 13,613명에서 18,147명으로 33.3% 증가하고 교회수는 78개 교회에서 92개처 교회로 20%의 증가를 이룬 것이다. 이런 결과는 노회산하 전교회의 복음전파사역 감당을 위한 열심있는 노력의 결과이며 또한 조직된 역대노회의 단합과 정책의 확실한 추진의 결과라고 사료되며 성령님의 역사에 대하여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바이다.
4) 제73회 임 옥 총회장
7회(1986. 10. 27. 인창교회. 노회장 현시영 목사)때는 1938년 9월 9일에 회집되었던 제27회 총회가 결의했던 일제하의 신사참배결의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던 사실을 깊이 통감하고 당시의 결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총회에 헌의하자고 결의하였고, 8회(1987. 4. 27 덕수교회)때는 전국탄광지역 광부들의 처우개선을 총회에 헌의하기로. 오병수목사는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9회(1987. 10. 26. 정릉교회 노회장 김태규 목사)때는 강상우, 김이홍 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목사노회장 3인마다 장로 노회장 1인 선출하는 일 잠정합의하고 임 옥 목사께서 총회 부회장으로, 그리고 10회(1988. 4. 25. 상신교회)때는 성산교회수습위원회, 학사건립위원회 조직을 거쳐 11회((1988.10. 3. 포천읍교회)시에 성북시찰-상계시찰을 분할하고 임 옥 목사께서 제73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음을 전 노회가 함께 기뻐하였다. 12회에는 시국에 대한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우리노회의 입장, 여성안수 총회헌의키로 했다. 그리고 첫 장로 노회장으로 홍일표 장로가 피선되었다.
5) 씨애틀노회와 결연
13회(1989. 10. 30. 성북중앙교회 노회장 이광선 목사) 때는 결혼상담소를 정릉교회에 설치키로 했고 미국 씨애틀노회(seattle PCUSA) 와 선교 협력을 모색하고, 14회(1990. 4. 30. 종암교회. 김윤식 목사)때는 사형제도폐지안을 총회에 헌의하고 임원개선방안으로 -정,부회장은 투표과반수로 하고 기타 임원은 다점자로 하다, 김윤식 목사를 부총회장 후보로 추대하고 15회(1990. 10. 29. 동성교회 노회장 최덕한 목사)때는 노회 사무실 분양에 관한 기독교회관 신관(연합회관 100여평)을 매입키로 결의, 총회대회제도 실시 헌의, 노회수양관건립위원회 조직하고 「서울북 씨애틀 결연식」을 조인했고 16회(1991. 4. 29. 영암교회)때는 장암교회건 조사위원회 조직하고 총회에 환경보전위원회 설치를 헌의하기로 하고 씨애틀노회와의 구체적인 협약서를 체결하였다.
6) 제76회 김윤식 총회장
제73회 총회에서는 영암교회의 담임이신 임 옥 목사께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또 지난 제76회 총회(1991년 9월 12-18일)에서는 종암교회 당회장이신 김윤식목사께서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본 노회로서는 노회가 분립 발족한지가 불과 8년밖에 안되었지만 두 분의 총회장을 배출하게 되었으니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노회의 자랑이며 노회원 전체가 기뻐해야 하는 일이며 하나님께는 큰 영광아 되는 줄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울북노회의 긍지와 명예에 손상됨이 없도록 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안고 있다.
1991년 10월 28일 오전 10시 상신교회에서 제17회 노회(노회장 최병두 목사) 노회운영에 관한 세칙(춘계1일 노회), 총회 헌법 개정 수의안은 통과(장로 및 여성안수권)시켰다. 「선교와 봉사에 힘쓰는 교회(행5: 42)」라는 주제로 개최된 것이다. 특별히 금번 노회에서는 노회사무실에 상근간사를 임원회의 추천에 의하여 김인식 장로를 인준한 일이며, 노회의 회계연도를 10월 1일부터 익년 9월 30일까지로 하는 재정부의 제안을 가결하였으며 노회 산하의 각 교회들은 크게 부흥성장 하였다.
7) 노회창립 10주년
제18회(1992. 4. 27. 도원교회) 임 옥 목사를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노회운영위원회의 발전적인 개선 방안이 논의 되었고 제19회(1992. 10. 26. 영암교회. 노회장 이영갑 장로) 노회 사무실을 연합회관으로 이전하였고 1992. 11. 16에 장로 노회장으로 이영갑 장로가 피선되었고 10주년이 되는 다음해에 기념행사를 갖도록 의논했다. 제20회(1993. 4. 26. 수유동교회)때는 노회 창립10주년 기념간담회, 심포지움, 합창제 등의 기념행사를 은혜롭게 가졌다.
- ① 금번 노회에서는 그간 준비해 오던 한국기독교회관 신축건물내에 노회사무실을 준비하여 이전하며 이전 행사를 행한 일과.
- ② 현재까지 진행중이던 씨애틀노회와의 선교협력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연구하며 추진하개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여 상설기구로 전문위원을 위촉하는 일과.
- ③ 노회 재산을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노회재산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계획으로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 ④ 노회수양관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회가 명분있게 업무를 처리케 한 일이며 노회가 나날이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5. 새천년 패러다임
- 21회 노회(1993. 10. 정릉교회. 노회장 한태인목사) 전노회원 노회 경내학교 합창단 및 교회성가대, 청년, 중고교, 아동부 학생들과 교사대표를 초청하고 미 씨애틀노회대표(24명)들을 초청하여 1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며 공로자 모범교회들을 표창하였다. 그리고 임원대표들이 씨애틀노회를 방문하고 교역자 부인 중창단 순회 공연이 있었다.
- 22회 (1994. 4. 25. 창동교회)
- 23회 (1994. 10.31-11. 1. 상신교회. 노회장 우제돈 목사)
- 24회 (1995. 5. 1-2. 정릉교회) T.V 사업분담금 99,280,000원 완납, 선교대회 성료(2. 20-21. 동신기도원) 장로연령 30세 이상된 자로 임시목사 시무기간 3년으로, 총회 총대수 1,500명으로 조정안 노회수의 가결하다.
- 25회 (1995. 10. 30-31. 장석교회. 노회장 문장식 목사) 노회 10년사 발간.
- 26회 (1996. 4. 29-30. 미암교회)
- 27회 (1996. 10. 28-29. 상신교회. 노회장 김범열 장로) 노회분립위원회 발족, 목포노회와 자매결연.
- 28회 (1997. 4. 28-29. 종암교회) 포천읍교회 양분-포천중앙). 시찰행정구역 재정비연구위 조직.
- 29회 (1997. 10. 27-28. 영암교회. 노회장 윤두호 목사) 장로 재교육 프로그램연구위 조직.
- 30회 (1998. 4. 27 충은교회) 이기풍선교기념관 건축추진위 조직.
- 31회 (1998. 10. 26. 창동교회. 노회장 박기철 목사)
- 32회 (1999. 4. 26. 상신교회) 서울강북노회 분립연구위
- 33회 (1999. 10. 25-26. 장석교회. 노회장 최진식 목사) 서울북. 강북노회 분립
2) 제86회 최병두 총회장
- 34회 (2000. 4. 27. 태릉교회) 정상홍 목사 면직, 최병두 목사 95회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 결의하다. 한국 장로교 서울 강북지역대회 개최하다(2000.4. 25. 영락교회
- 35회 (2000. 10. 30-31. 종암교회. 이용남 목사) 포천읍교회(정상홍)건 일단락, 시할분립안을 다음과 같이 조정하다 -포천(14교회) 서(16교회) 상계(20교회) 태릉(17교회) 도봉(11교회) 성북(8교회)
- 36회 (2001. 4. 23. 청운교회) 강북 권역 교사교육대회 개최하다. 부총회장으로 피선된 최병두 목사께서 제86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서울북노회 18년의 짧은 역사상 60개 노회중에서 제일 많은 총회장(임 옥, 김윤식, 최병두)을 배출하게 되었다.
3) 기구개혁바람
- 37회 (2001. 10. 29-30. 상신교회. 노회장 권혁영 장로) 십수년째 논란되었던 「정책 총회 사업노회」로의 기구개혁 문제가 매듭을 지어 많은 사업들이 노회로 이관하는 수임기구를 조직하였다.
- 38회 (2002. 4. 29. 영암교회) 노회에 수의된 총회 헌법개정안 (교리, 예식)이 찬성 가결되었고 미주 한인서중노회와의 자매결연을 체결하였다.
- 39회 (2002. 10. 28-29. 팔호교회 노회장 이정환 목사) 총회부회장 선출 방법을 추첨제로 바꾸기로 하고 시행안을 연구토록 하고 노회 20주년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다.
- 40회 (2003. 4. 28. 장석교회) 노회 20주년 기념행사(성가제, 책자발행, 강연회, 발표회 등)를 갖기로 하다.
4) 각종 통계
2002년도 교세통계표(노회집계용)
5) 향후 전망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는 역사의 순환을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반복」이라고 해석하면서 내외적인 도전과 여기에 상응하는 응전이 있는 역사만이 살아났고 다음 세대에 뭔가를 전수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가 이같은 과정을 밟아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승승계대하여 하나님의 선교가 이뤄지리라 사료된다.
- ① 총회는 인사행정치리에 전념하고 전도, 교육, 사회분야는 각 노회로 대폭 이관하여 하나님의 선교가 이 땅에 상생적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 ② 생명살기리 10년 운동(2002. 9.- 2012. 8.)으로 그 첫해를 원년으로 삼고 전반기 5년(2002-2006)을 제1단계 작업으로 교육훈련을 통한 생명살리기 운동에서 ㈀ 신앙의식화 작업 ㈁ 지역과 노회의 생명살림 ㈂ 선교를 위한 구조조정 ㈃ 지역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을 꾀하고 후반기 5년(2007-2012)은 제2단계 작업으로 일체와 갱신분과, 민족복음화분과, 사회선교와 경제분과, 세계선교 에큐메니칼분과, 교육 및 훈련분과, 한반도평화분과, 기독교문화분과, 정보화(언론 홍보)분과, 기본정책성장분과, 생명목회분과를 완성한다.
- ③ 북한에 예배당이 서고 예배행위가 이루어지고 신학교가 세워진다는 것은 복음선교에 큰 청신호라 할 수 있다. 북한에 공여되는 모든 노력들이 기독교가 밑받침이 되고 있으며 특히 우리 교단이 그 창구가 되어 있음은 극히 소망적이다. 그런데 앞으로 당면하게 될 교파의 난립, 이단의 난무, 신학의 난맥에 대해서는 올바른 대처가 있어야 한다.
- ④ 서울 북부지역이 개발되고 포천이 시로 승격되면서 우리 노회는 명실상부하게도 대북 선교의 관문이 되었다. 20주년을 기념하여 세우게 될 기념예배당을 중심으로 통일을 대비하여 노회가 해야할 과제들을 심사숙고하며 우리 교단의 위상을 제고하는 일에 앞장서야겠다.